메뉴 건너뛰기

XEDITION

도척면 지명유래

도척면 지명유래

▣ 노곡리(老谷里)

이 마을 뒷산이 노루처럼 생겼는데 이 마을은 그 목 부분에 위치 하고 있다고 해서 '노루목'이라고 했는데 행정구역 개편시에 '老谷里'라 하게 되었다.

가) 노루목
이 마을에서 상림리(祥林里)로 넘어가는 산의 생김새가 새끼노루가 어미노루를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해서 '노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나) 고녹골
이곳에 있는 논들은 풍부한 관개수로에 비옥한 땅이므로 '고운논'이라 불렀는데 여기에 비옥하다고 해서 옥자를 넣어'고은, 옥, 골'이 합하여 '곤옥골'이 되고 다시 '고녹골'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진우리(鎭牛里)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에 진(鎭)말과 우치(牛峙)말을 합하여 '진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 옛진말
현재의 진우리 공동묘지 밑에는 (新安) 주(朱)씨가 공동거주를 하고 있었는데 상여의 출입이 많은 곳이라 이곳으로 옮기면서 먼저 살던 곳이라고 해서 '옛진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나) 우치(牛峙)
이 산에 있는 바위들이 하도 기안괴석이어서 이것을 갖다가 삼각산에 갖다 놓으려고 바위 구멍을 뚫어 소로 끌고 가다가 이 고개에서 소의 보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소가 넘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소티'라 하고 한자로는 '牛峙'라 쓰게 되었다.

 

다) 신대(新垈ㆍ새말터)
예진말, 우치부락, 진말이 선서대로 형성된 다음에 새로이 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새터말'이라 하고 한자로는 '新垈'라 쓰게 되었다.

 

라) 웃점말
이고의 토질이 질그릇 만드는 점토(粘土)이어서 '점말'이라 했는데 그 위치가 위에 있다고 하여 '웃점말'이라 한다.

 

마) 큰골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고 큰 골짜기라고 해서 이곳을 '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상림리(祥林里)

이 마을 뒷산의 형태가 누에모양이고 이곳에서는 뽕나무가 잘 된다고 해서 '상림리'(祥林里)라 했는데 이를 후에 '祥林里'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 사기소(沙器所)
옛날에 이곳에서는 사기그릇을 굽던 곳이라고 해서 '사기소'라 하였다.

지금도 사기그릇 깨진 것이 많이 발굴되고 있는 곳이다.

 

나) 승방(僧房)터
이곳은 산세가 좋아 부처님을 모시는 절을 지었으나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고 해서 '승방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 시어골
이곳에는 산세가 험준하고 맹수들이 많아서 '이곳에서는 살기 싫다'고 해서 '시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방도리(芳都里)

1917년 행전구역 개편시에 '방등리'(芳登里)와 '내도척(內都尺)'을 합하여 '방도리'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 되재
속설에 의하면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던 은조왕이 땅을 되풀이해서 재었다고 해서 '되재'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곳은 용인시와 접경지대라 산이 험준하여 넘나들이 '된 재'란 뜻은 '된재'가 변한 말인 듯하다.

 

▣ 도웅리(陶雄里)

조선시대에 이 곳에서는 질그릇을 만들어 팔러다닐 때 넘던 '독고개'와 '옹골'(甕洞)을 합하여 '도웅리'라 부르게 되었다.

가) 고해(古海)
도웅이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예전에는 벼락바위 앞으로 흘렀는데 그때 이 냇물이 넓고 길어서 마치 바다 같다고 해서 '고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독고개
옛날에는 한양으로 옹기(甕器)를 팔러갈 때 넘던 고개라 하여 '독고개'라 하다가 '옹골'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

 

▣ 유정리(柳井里)

1910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유여동'(柳余洞)과 '운정동'(雲井洞)을 합하여'유정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 운정동(雲井洞ㆍ굴우물)
이 마을에는 옛부터 유명한 영천(靈泉)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운정동'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구름우물'이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굴우물'이라 한다.

 

나) 미륵동(彌勒洞)
고려시대부터 노상에 버려두었던 석불(石佛)을 조선조 말기 진사(進士 조희백(朝凞百)의 아내가 잘 모시자 낳지 못하던 득남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던 이후부터 이곳은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 되었으니 마을이름도 '미륵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 바위산골
마을 주위에는 태화산과 미역산이 있어서 기암괴석이 많은데 마을이름도 '바위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궁평리(宮坪里)

조선조 시대에 공에서 내린 땅이라고 해서 이곳을 행정구역 주정 당시 '궁평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백제시대 공주의 땅이 있던 들(坪)이란 뜻으로 '궁뜰'이라 부르기도 한다.

 

▣ 추곡리(楸谷里ㆍ가래실)

조선시대에 서판서(徐判書)란 분이 피난처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여 살기 위하여 큰 집을 짓고 둘레에 가래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을 '가래실'이라 했는데 이를 '추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위로